요즘 입꼬리가 발바닥까지 내려앉은 표정을 짓고 있다는걸 종종 깨닫는다. 자꾸 마음안에 있는 감정의 그릇이 가득차 찰랑거리는거 같았다. 그래서 작은 흔들림에도, 몇방울의 감정에도 넘칠 것만 같은 아슬한 기분이였다. 덕분에 작은 친절도 베풀지 못하고 살고 있었다. 그런 스스로를 포함해서 모든게 짜증나고 우울했다.
템플스테이를 예약한 날도 누군가의 말한마디에 기분이 팍 상해버렸다. 이대로는 안되겠다 싶어서 한번쯤은 가보고 싶다고 생각했던 템플스테이를 검색했다. 마침 이벤트도 하고 있었다. 여러 사찰 중 세계문화유산이자 김구선생님께서 머물렀었다는 마곡사에서 템플스테이를 하기로 마음먹고 예약했다.
공주터미널에 도착해 마곡사에 가는 770번 버스를 기다리다가 의자 밑에 떨어진 동전지갑을 봤다. 살짝 열어보니 할머님의 사진과 이름이 적힌 교통카드가 있었다. 버스정류장 바로 뒤에 있는 호떡가게 사장님께 드리니, 찾아오지 않으시면 경찰서에 맡기겠다 하셨다. 다음주쯤에는 할머님께 지갑이 온전히 잘 돌아가면 좋겠다.
버스타고 공주로 넘어올때까지만해도 머리가 복잡하고 이런저런 생각이 많이 났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공주터미널에서 마곡사로 가는 버스를 타니 조금씩 마음이 가벼워지기 시작했다. 창밖의 풍경도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어디든 이동할때면 항상 이어폰을 꼽고 있었는데, 왠지 듣고 싶은 음악도 없어 이어폰을 꼽지 않았다. 그러고 나니, 버스 안에 있는 할머님들의 도란도란 이야기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버스소리, 바람소리도 새삼스레 들려왔다.
마곡사 정거장에 내려 마곡사로 넘어가는 길에는 좋은 글귀들이 있어서, 빨리 가고 싶은 마음에도 잠시 멈출 수 밖에 없었다. 잠시나마 발걸음을 멈춰 읽게 된 글귀는 사진을 찍어왔다.
부처님 오신날을 기념하는 등이 알록달록 있었다. 등에는 부처님이 아주 귀엽게 그려져있다.
무교인 나에게 꼭 종교를 고르라 한다면, 나는 주저하지 않고 불교를 선택할 것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가장 익숙하다. 어렸을 때 할머니, 할아버지와 함께 온가족이 절에 한번씩 간 기억이 있다.
부처님 오신날을 위해 여러가지가 준비되고 있었다. 특히 마곡사 중앙에 있는 오층석탑을 둘러 걸려있는 황금색 소원지가 눈에 띄었다. 천천히 돌며 읽어보았다. 아이가 썼든 어른이 썼든 왠지 웃음이 나기도 눈물이 나기도 했다. 내가 쓰고 싶은 말들이 다 적혀있었다. 그냥 모두 비슷한 마음으로 살아가는구나 싶은 생각에 위로가 되었던것 같다.
소원지를 읽다보니 나도 하나 걸어두고싶었다. 나도 많은 사람들의 소원지처럼 우리 가족의 건강과 행복을 빌었다.
1785년 재건된 대광보전. 건물에 쓰인 목재와 그림이 240년이 되었다는게 참 신기했다. 240년만큼 바래진 색깔은 더더욱 매력적이였다.
무엇이든지 있는 것을 관리하는것보다 버리고 새로운것을 취하는게 쉬워버려진 현대사회. 한달이 채 안되는 기간동안만 자재가 쓰이는 팝업스토어나 잦은 개폐업으로 인해 멀쩡한 인테리어가 철거되는 요즘 세상에서 보기 어려운, 시간이 쌓인 것들의 매력과 가치를 볼 수 있었다.
템플스테이 옷을 입고 방석에도 앉아봤다. 옷도 방석도 생각보다 더 편했다.
스테이 하는 동안 그림을 그리겠다고 다짐했었지만, 그럴 시간은 없었다.. 생각보다 매우 바빴다. 종 옆에 있는 목어를 그리고 싶었는데. 다음에 절에 가게되면 차분히 앉아 그림그리는 시간을 가지고 싶다.
템플스테이를 위한 본관의 여러 방 중 내가 묵은 방이름은 "정진"이였다.
잠시 주어진 자유시간에 방에 배치된 책 중 하나를 펼쳤다. 마침 정진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간단이 없는 그것이 정진이라. 일하며 공부하며 공부하며 일하며, 간단없이 정진하라.
흔들리지 말고 하고자 하는것을 꾸준히 해나가야겠다고 다짐했다. 하고자 하는것이 어떤건지는 구체적이진 않지만, 방향은 정해져 있으니까!
마곡사에서 두마리의 고양이를 만났다. 요 턱시도 고양이는 말이 많았다. 야옹야옹.
이건… 방에서 유튜브 보는 내모습 같은데…
저녁예불이라는걸 해보고 나왔을 때 하늘. 연보랏빛이 살짝 감도는 듯한 연파란하늘에 연노랑색 달이 떠있었다.
카메라를 따로 안가져간게 너무 아쉬웠다. 핸드폰을 바꿔야할까.
밤 사진을 잘 찍고 싶은데. 밤에 절에 있어보기는 처음인지라 더 새로웠다.
낮에는 당연하게 느껴졌던 냇물소리가 밤에는 크고 새삼스럽게 느껴졌다. 냇물소리는 키고 끄는 음악소리가 아니였지 참.
잠들기 전에 일기도 짧게 쓰고, 낮에 잠시 펼쳤던 책을 다시 펼쳤다. 이 책을 다 읽고 갈 시간은 없으니 목차를 보고 읽고 싶은 부분을 골라읽었다. 마지막 장, 일 공부 행복.
새벽 4시 30분에 방 바로 앞에서 들리는 타종소리를 들으며 잠에서 깼다. 얼른 준비하고 나가 아침예불을 하고 108배를 했다. 108배를 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은 구절이 있다. 정확한 말은 기억이 안나지만, 내가 이해한 그 두 문장은 이렇다. 미움은 가장 큰 불행, 자비로움이 가장 큰 행복. 최근에 내가 불행했던 이유가 누군가를 미워하기 때문이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침공양 이후 스님과의 차담이 있었다. 차담에서 스님께 사람이 자꾸 미워지는데, 이 마음을 어떻게 해야할까요 여쭤보았다. 스님께서는 내가 미움을 담았을 뿐이라고 하셨다. 안담으면 된다고. 말씀을 듣고보니 미워하여 불행해지는 선택을 한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미워하는 선택을 하지 않으면 될 것 같은데… 노력을 해봐야겠다.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 행복하고 싶다.
차담 이후에는 김구선생님께서 묵으셨던 백련암에 갔다. 백련암 위에는 한가지 소원을 꼭 들어주시는 마애불 기도터가 있다. 우리가족 건강하고 행복하게 해달라는 소원은 소원지에 적어두었으니, 여기서는 조금 다른 소원을 빌었다. 작은 것에도 행복할 줄 알고 고난과 시련을 잘 이겨낼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터를 지나 명상길을 걸으려 했다. 하지만 길을 잘못들어 명상길이 아닌 등산로로 활인봉을 갔다. 활인봉에 올라갔을 때 아무도 없어서 정말 고요했다. 들리는 소리라곤 바람에 나뭇가지와 나뭇잎이 부딪히는 소리정도. 가만히 눈감고 잠시 쉬려했는데, 기척이 느껴졌다. 사람은 아무리 봐도 없는데. 소리를 쫓아 시선을 옮겨보니 청솔모가 있었다. 덕분에 다른 사람들이 오기 전까지 청솔모가 밥먹고 나무타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점심공양까지 먹고 집가는길, 아쉬운 마음에 기왓장 사이로 해탈문을 바라보았다. 왠지 다음주에 출근할때는 좀 더 좋은 마음으로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템플스테이, 또 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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